왕을 쥐락펴락한 궁녀, 조선 뒤흔든 비선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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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쥐락펴락한 궁녀, 조선 뒤흔든 비선 실세

sk연예기자 0 237 0 0
"조선 3백년 사직은 김상궁이 망치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통곡합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조선 15대 광해군 시절 한 홍문관 관리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한 궁녀의 전횡을 지적하며 통탄하는 내용이다. 고작 일개 궁녀에 불과한 '상궁 김씨'라는 인물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지목되었다는 점에서 역실적으로 그녀의 엄청난 영향력을 짐작게 한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유교 사회 조선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일개 궁녀로 시작하여 일약 천하를 호령하는 '권신'의 지위까지 오른 여성이 바로 상궁 김씨였다. 그녀는 타고난 정치감각과 모략으로 조선의 국정을 뒤흔든 희대의 '비선실세'이자, 무려 두 명의 국왕을 죽거나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킹메이커'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왕비나 후궁을 제외하고 조선 역사에서 이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록에까지 이름을 남긴 여성은 전무후무하다.

조선 역사 바꾼 궁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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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상궁 김씨는 누구이며 어떻게 조선을 뒤흔들었을까. 8월 9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궁녀 김개시는 어떻게 광해군을 폐위시켰나' 편을 통하여 조선의 역사를 바꾼 한 궁녀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김개시(金介屎~1623년)는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시대의 궁녀였다. 특히 광해군 시대에는 일개 궁녀를 넘어서 국왕의 책사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활약했고, 왕의 권위에 올라타 호가호위하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김개시의 출생과 입궁 과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름에서 그녀의 배경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는데, 개시의 한자 시(屎)는 '똥'을 뜻하기 때문에 그녀의 본명은 '김개똥'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록에는 본명을 그대로 적기 불편했기 때문에 한자로 바꿔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개똥이는 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었고 실제 궁녀들이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개시 역시 노비의 딸로 태어나 10대 초중반 정도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개시는 당시 여성들, 특히 하층민들은 거의 배우지 않았던 글을 깨우칠만큼 어릴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졌다고 한다. 그녀가 문자를 배웠다는 것은 나름대로 야심만만하고 신분상승욕구가 강한 능동적인 여성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당시의 궁녀들은 처음 모신 상전을 끝까지 모시는 것이 원칙이었다. 입궁한 김개시가 모시게 된 상전이 바로 왕자 시절의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이었다. 총명했던 김개시는 성심을 다하여 광해군을 모시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남은 훗날 광해군과 김개시, 두 사람의 인생과 조선의 역사까지 바꾸는 운명적인 인연이 된다.
 
1592년, 평온하던 조선을 뒤흔드는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이 발발한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수도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당시 국왕 선조는 궁궐을 비우고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선조를 수행하는 파천길에 뜻밖에도 김개시도 합류한다.
 
김개시는 본래 광해군의 궁녀였지만,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맞이하여 우수한 궁인들 위주로 왕의 수행원을 재편성하면서 김개시도 특별히 발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시가 김개시에게는 또다른 기회가 된 셈이었다. 김개시는 남다른 총명함으로 선조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전쟁중에 단숨에 일반궁녀에서 정 5품 특별상궁이 되는 파격승진을 누렸다.
 
왜란으로 신분이 달라진 또다른 인물은 바로 김개시가 모셨던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적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세자의 자리를 25년이나 비워놓았으나, 왜란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다급해지자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피난을 떠나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하던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임시로 세운 조정)를 이끌며 흐트러진 조선의 민심을 수습했다. 세자 광해군의 이러한 전시 활약상은 국왕 선조가 추락시킨 왕실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 궁으로 돌아온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는 악화된다. 선조는 평생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왜란으로 권위가 추락한 자신과는 정반대로, 전쟁영웅으로 활약하며 민심을 얻은 아들 광해군 역시 질투하고 견제했다. 선조는 세자 자격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광해군에게 "너는 임시로 봉한 세자일뿐"이라고 일축하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이는 광해군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다.

또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 지 2년만에 간택으로 계비 인목왕후를 들인다. 그로부터 4년뒤인 1606년 인목왕후는 아들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가 그토록 바라던 적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선조에게 배척당하고 있던 광해군으로서는, 이제 아버지가 정말로 세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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