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원생이 일본 경찰서장에게 머리 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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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원생이 일본 경찰서장에게 머리 숙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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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와 쓰네기치를 기리는 비는 요코하마시 도젠지(東漸寺)에 있다. 이번 천승환의 일정 중에서 오카와 쓰네기치를 찾아가는 건 특별한 일정이다. 그는 일본인이고 요코하마시 쓰루미 경찰서의 서장이었기 때문이다.
지진의 혼란 속에서 쓰루미 경찰서는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역 주민들이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몰려와 경찰서를 에워쌌다. 조선인 편을 드는 경찰서 따위는 부숴버려라라는 소리가 높았다. 오카와 서장은 군중 앞에 나서서 유언비어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소지품을 검사했지만 무기 하나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이런 오카와 서장의 태도에 군중들은 잠잠해졌다.
 
많이 알려진 그의 일화다. 1923년 10월 21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조선인 326명, 중국인 70명이 보호받았다고 한다. 이를 기려 1953년 3월 21일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쓰루미위원회가 오카와를 기리는 감사의 비를 도젠지에 세웠다.

천승환은 도젠지에 도착해 순서에 따라 청소를 하고 향을 올렸다. 다음이 촬영. 70-200GM 망원 렌즈를 달고 200mm까지 당겼다. 조리개는 F9까지 조여 비문을 또렷하게 담았다. 그 후 광각과 표준으로 갈아끼우며 정면과 양옆, 뒷면까지 촬영했다. 시간은 4시에 가까워 한낮의 햇빛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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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승환이 사진에 눈을 뜨게 된 건 2014년 LG하우시스에서 진행하는 독도사랑 청년캠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캠프에서 고수 두 명을 만났다. 기법이 훌륭한 친구, 자기만의 사진 철학을 가진 친구! 그때부터 천승환은 진지하게 사진에 다가섰다. 대학원에 들어가 미학을 공부하고 많은 작가의 작품을 살폈다. 군함도를 비롯해 강제연행의 상처를 찍은 이재갑, 위안부 관련 작품 활동을 오랫동안 한 안해룡, 디아스포라의 삶을 기록하는 성남훈 등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이 가야할 길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는 사진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2017년의 국외사적지 촬영도 그렇고 이번 관동 대학살 유적지 촬영도 그랬다. 자신의 사진 세계가 쭉쭉 자라나는 것 같았다. 잊힌 사건이 자신의 작은 사진 한 장으로 어둠을 찢고 나올 수 있다는 게 기쁨이었다. .
 
그런 마음 때문인가? 천승환은 이번 관동을 촬영하면서 한 곳에서 보통 700~800번 이상 셔터를 누르며 정성을 기울였다. 또 아이폰의 라이더(LIDAR) 3D스캐닝 프로그램으로 영상 데이터까지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장소별로 10장 안팎을 추려 보정 작업을 할 계획이다. 우선 JPEG 파일로 공개하고 나중에 원시 데이터인 로우(RAW) 파일로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데이터를 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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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와 쓰네키치를 기리는 감사의 비를 떠나오면서 천승환은 여러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번 작업을 떠나기 1년 전부터 인터넷 검색과 논문, 가토 나오키의 <9월, 도쿄의 거리에서>, 야마다 쇼지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강덕상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을 읽으며 준비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조선인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몇몇 일본인이다. 이날 둘러본 오카와 쓰네키치, 미쓰자와에 살던 해군 대령 무라오(村尾履吉), 스미다구 호센지(法泉寺) 경내에 기림비가 있는 사나다 자아키(眞田千秋)다. 천승환은 이번 여행에서 세 사람의 사적을 방문 계획에 넣었다.

물론 여러 시각이 있다. 오카와는 경찰서장이니 주민 보호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건데 그렇게 칭찬할 필요가 있냐는 시각도 있다. 또 일본의 극우가 "일본 경찰이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했다. 이것이 일본의 참모습이다"라며 오카와를 활용하고 있으니 상황이 고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승환은 모두 조선인을 박해할 때 인간애를 발휘한 일본인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의미있다고 판단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과 동지애를 나눴고 후세 다즈치가 2·8 독립선언을 한 유학생과 연대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의 청년이 손을 잡아야 극우로 치닫는 양국 정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오카와 쓰네기치의 비를 찾았고 촬영이 끝났을 때 오기 잘했다고 자신을 칭찬했다.
 
무너져가는 보화종루
 
익숙해지고 단련된 탓인가. 60일이 넘어가면서 허리 통증은 사라졌다. 65일에 걸쳐 군마, 사이타마를 거쳐 도쿄, 가나가와현을 오갔다. 이제 지바현과 나리타(成田) 시의 사적을 찾아가면 80일의 일정은 다 끝난다. 72일 차가 되는 날 천승환은 지바현 야치요시의 간논(觀音)지로 향했다. 실은 나흘 전에도 왔는데 비가 내려 '보화종루'를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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