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 경지 개척한 노장 댄서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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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경지 개척한 노장 댄서의 연대기

sk연예기자 0 225 0 0
어느 선 굵은 일본 조연배우에 대한 기억
 
타나카 민이라는 일본 중견배우를 처음 접했던 계기는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코>를 통해서였다. 두 주인공이 만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데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히미코의 집'을 세운 주인 '히미코'가 바로 타나카 민의 배역이었다. 그의 등장 장면은 지극히 짧지만 영화 내내 남녀 주인공 다음가는 포스를 뿜어냈다는 데에 이견은 적을 테다. 주인공 '사오리'(시바사키 코우)에겐 성정체성을 깨달은 뒤 어린 자신과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을 버리고 커밍아웃한 아빠로, 사오리가 히미코의 집을 맡아 정착하기를 바라는 젊은 게이 청년 '하루히코'(오다기리 조)에겐 한참 나이가 많은 연상의 동성연인이었으니 히미코의 존재감은 실로 영화 전체를 장악하다시피 했었다. 대개 젊은 꽃 미남 혹은 곰처럼 푸근한 중년을 떠올리게 마련인 게이 정체성 캐릭터 중에서 타나카 민이 구현한 히미코 캐릭터는 이채로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후 그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첫 출연작으로 일본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조연상을 수상케 했던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만남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목소리 연기이긴 했지만 다카라쵸의 두 악동 '쿠로'와 '시로'에 다음 순번을 예약할 정도로 깊은 각인을 남긴 동네 야쿠자 '네즈미' 역을 소화한 애니메이션 <철콘 근크리트>에서도 돋보였다. 국내 여러 영화제에서 접하고 탄성을 질렀던 츠다 테츠이치로의 35mm 필름으로 구현한 환경영화 <이야 모노가타리>에선 신비한 능력을 가진 채 산에 버려진 주인공 '하루나'의 양아버지이자 그 자신 역시 마치 산의 정령과도 같은 노인 역할을 맡았다.
 
환갑이 다 되어 늦깎이로 연기 데뷔한 이 신인배우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종이달> 등의 작품으로 일본 인디영화의 계보를 이어가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양의 나무>에선 한적한 시골마을에 가석방되어 온 살인범 6인방의 일원인 '오노 타츠미'를 맡아 갱생여부를 의심하는 주민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극중에선 전혀 웃지 않고 과묵하게 주어진 일에만 정진하지만 뭔가 엇박자의 상황 연발로 관객을 웃게 만들곤 했다.

장르영화의 거장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일본의 인기만화를 영화화한 <불멸의 검(무한의 주인)>에선 오직 임무에만 충실한 고수 '하바키 카기무라'를 맡아 주인공들을 궁지로 내모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렇듯 출연한 작품에서 주로 선 굵은 조역으로 관객에게 인상을 새기는 배우다. 한국영화 <사바하>에도 출연해 티베트 불교 고승을 맡았고, 최근엔 빔 벤더스 감독의 오랜만의 극영화 재기작품으로 평가받는 <퍼펙트 데이즈>에 등장했다. 소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1945년생 고참 배우이지만 배우에 대해 사실 잘 알지는 못했다. 늦깎이 연기 데뷔가 신기했던 정도다.
 
세계를 누비는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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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알고 보니 그의 본업은 댄서이자 무용가라 했다. 모던 발레를 전공했고 전 세계 투어를 돌 정도의 명망을 가졌다는데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다. 그와 인연이 깊은 이누도 잇신 감독이 타나카 민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단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는 2017-2019년 기간 주인공이 전 세계를 순회하며 벌이는 '로커스 포커스(장소의 춤)' 공연과 그의 생애 및 일상을 기록한 영상, 그리고 유년시절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의 72-74살, 2년의 시간 동안 진행된 나이를 무색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인 5개국 48개소 90회 공연의 정수만 모은 실황에다, 그의 춤에 대한 철학을 소개하는 경력 해설과 일상,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소년이 춤에 매혹되는 계기의 조합이다.
 
영화의 시작은 포르투갈의 해안도시 산타크루스다. 여기에서 타나카 민은 '시작의 춤'을 선보이려 한다. 영화 속에서 계속 공연되는 일련의 '장소의 춤' 서막에 해당된다. 도쿄 이케부쿠로의 소극장 '플랜B'에서 1980년대부터 개인 공연 및 후진양성과 프로듀스에도 열심인 그의 일상이 묘사되고, 다음에는 히로시마의 누나쿠나 신사 '노' 공연장에서 드럼이나 기타만을 배경 반주로 삼아 일본 전통춤과 현대무용이 결합된 것 같은 퍼포먼스를 펼친다. 기인의 풍모를 한 타나카 민이 신사로 오르는 계단에서 비틀비틀 온몸으로 표현하는 광경을 숨죽인 채 사방을 둘러싼 인파가 주시한다.
 
타나카 민은 공연이나 촬영이 없을 땐 무엇을 할까? 궁금해 할 이들에게 마침 그의 일상이 소개된다. 그는 야마나시 현 키요쿠라 마을에서 자신이 '도화촌'이라 이름 붙인 오두막에 기거하며 농사일에 매진한다. 물론 생계를 위한 농사는 아니다. 그는 '춤을 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택했다고 한다. 수확한 채소와 작물을 이웃들과 나누고, 시골의 널찍한 공간을 활용해 소품 창고와 서고도 갖췄다. 인간 가족은 보이지 않지만 1985년, 그의 나이 40에 춤출 힘을 키우고자 시작한 농촌 생활의 곁에는 20살 된 반려묘 '하나'를 비롯해 2살 '타나카 아오', 3살 '타나카 후지오' 3살 '타나카 모모에', 4살 '타나카 치비치비' 고양이 4남매와 5살 먹은 양 '타나카 하루' 같은 식구들이 가득하다.
 
그의 공연은 계속 이어진다. 12년 만에 도쿄에서 극장공연 '형태의 모험'에 도전하고, 서점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낭독극과 유서 깊은 사원에서 설치예술과 연계된 실험극에도 가담한다. 연습과 공연의 연속 가운데 애니메이션과 내레이션으로 과거 회상이 넘나들어온다. 그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나의 어린이'라 지칭한다. 춤을 추게 된 시작과 원초적 춤의 정신을 익혔던 홀로 산행의 기억, 남이 스쳐 지나치던 이웃들에 대한 관찰과 기억이 서술된다. 벌목작업 때문에 그의 마음의 고향 산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느꼈던 장벽과 이를 넘고자 하는 분노의 감정, 원만하지 못했던 경찰 아버지와의 추억, 가난했던 과거 생활 회상 가운데에는 이웃의 조선인 가족이나 좀도둑 가족에 대한 회고가 특히 진하게 남는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모던 발레에 정진했지만 거울을 보며 연습하는 게 마치 거울 속 자신에게 갇히는 것처럼 답답했다고 회상한다. 그런 가운데 자유로운 육체의 반란을 추구하는 무용가 히지카타 타츠미의 '부토 댄스'에 매료되고 이후 자신만의 춤을 연마한다. 도쿄 매립지를 배경으로 환경파괴와 인간문명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 사진가와 공연한 나체 퍼포먼스는 일본에서 그를 체포되게 만들었지만 대륙 반대편 프랑스 예술제에서 화제가 되면서 오늘날 그의 예술가로서의 기반이 되어준다. 1978년 파리 공연에는 배자르나 수전 손택 같은 당대 유럽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이 잇달아 찾으며 세상이 자신의 춤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좌절했던 타나카 민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가장 시련에 처한 시절에 그에게 손길을 내민 프랑스 예술계에 대한 애착이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 연속된다. 프랑스 푸아티에 아트비엔날레에서 '장소의 춤'을 추고 관객과 대담을 나눌 때 그의 표정은 행복하고 긍지가 넘친다. 그의 춤을 높이 평가했던 프랑스 작가 로제 카유아의 무덤에 참배하며 그와의 일화를 전할 땐 뭉클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는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퍼포먼스를 펼친 타나카 민에게 '이름 붙일 수 없는 당신의 그 춤을 멈추지 마시오.'라는 감동적인 평을 남겼으니 말이다.
 
포르투갈과 일본, 프랑스 등 세계를 누비던 그의 영화 속 '마지막 춤'은 후쿠시마로 향한다. 후쿠시마 현 우케도 마을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이전에는 60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지만 이제 그 마을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하지만 타나카 민은 마을에서 새로 큼직한 집을 지은 거미를 관객으로 대자연의 회복을 희구하는 춤사위를 한판 펼친 뒤 이번에는 타키네 마을의 마치 그 한 그루로 원시림의 태고를 간직한 것만 같은 벤텐 벚나무를 위로하는 춤을 이어간다. 그렇게 점점 노장 댄서의 윤곽은 자연의 풍경과 섞여 들어간다.
 
배우로서의 매력을 형성케 한 노장 댄서 인생의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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