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그 하고, 손하트 날리고... 돌하르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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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그 하고, 손하트 날리고... 돌하르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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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과장하면, '내가 산방산을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 돌을 만지느라 몸을 너무 많이 썼어요. 산지에서 돌을 가져와 조각하고, 설치하고, 돌집을 짓고, 관람로 바닥에 돌을 깔고... 23년을 작업하면서 엄청난 양의 돌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그 양이 아마도 산방산만큼 되지 않았을까 하고 동화적인 상상을 해봅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상곶(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자연상태로 남아 있는 숲 지대) 5천여 평에 자리 잡은 돌하르방 미술관을 일궈낸 김남흥 관장의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은 넓은 야외 미술관은 곳곳에 그의 땀과 혼이 밴 돌하르방 작품과 돌집들로 이루어졌다. 김 관장 자신도 돌하르방과 닮았다. 검게 탄 피부와 거친 손, 꾸미지 않는 넉넉한 인상이 그랬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제주도미술대전 우수상을 3회나 수상하고, 초대작가로 잘 나가던 그가 어떻게 해서 돌하르방 조각의 길을 걷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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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이면, 어느날의 깨달음

"전업 화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제주 풍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계절 따라 그림을 그리러 다녔습니다. 1997년으로 기억되는데, 애월읍 어음2리에 초가집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집이 있길래 찾아가 3, 4일 정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그때 그곳에 사시던 할머니와 가까워졌지요. '어디서 옵데가? 무슨 일 햄수가?' 하고 물으시면 제가 이런저런 대답을 하고, 저도 '이 집 언제 지엇수과? 가족은 어떵 되엄수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초가집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림을 그리다가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가까워지면서 화폭에 임하는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저는 이걸 현상과 이면이라고 비유하고 싶어요. 현상만 보고 그리다가 그 감춰진 이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제주를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우당도서관과 제주대학교 향토자료실 등을 드나들고 문화유적지 현장을 답사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던 중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돌하르방을 만나게 됐습니다."
 
김 관장이 뒤늦은 제주 인문학 공부를 하던 중 옛 돌하르방을 만난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예술가로서의 그의 길이 달라졌다. 조각가로 변신을 했고, 돌하르방미술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운명적 만남에서 그는 무엇을 봤을까.
 
"제주도에 산재한 270여 년 전 돌하르방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이 섬에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제주 사람의 결과 너무도 닮았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전까지 제가 자랐던 서귀포에서 본 관광상품 돌하르방과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여지껏 본 돌하르방이 화장을 잘한 얼굴이었다면, 참 얼굴은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죠. 그래서 그림은 좀 뒤로 하고 돌하르방 조각을 하게 된 겁니다. 이때부터 남아 있는 조선시대 돌하르방 48기(유실된 1기 포함해 제주도에 46기,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를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재현 과정에서 '왜 제주 사람들이 이 돌하르방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본질을 찾아가다 보니 당시의 불안했던 삶을 위로받고자 돌하르방을 세웠을 거라는 결론을 얻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내가 창작자로서 오늘날 우리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돌하르방을 만들어보자, 돌하르방의 몸짓을 빌려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돌하르방이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제주도 역시 평화라는 화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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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돌하르방

김남흥 관장은 돌하르방 조각가이기 전에 많은 문헌과 현장답사를 통해 관련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전문가다. 그에게 감동을 안겨줬다는 원조 돌하르방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탐라기년'이란 문헌에 의하면 1754년에 김몽규 제주 목사가 옹중석(翁仲石)을 창건했다고 기록된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중국 진시황 때 흉노족 등 북방 이민족을 물리쳤다는 거인 완옹중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은 후 진시황이 그의 동상을 아방궁 앞에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고요.
 
제가 상상을 해보면, 김몽규 목사는 본토 사람으로 제주에 부임해왔을 겁니다. 막상 제주에 와보니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또 당시에 전염병이 돌아 800여 명이 죽어 나갔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흩어진 민심을 모을 작업이 필요했겠지요. 김몽규 목사는 아마도 완옹중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의 삶이 든든해질 것을 기대하면서 관 주도 사업으로 옹중석을 만들어 동·서·남 성문 앞에 문지기 역할로 세우게 된 것이지요. 우석목 무석목 등으로 불리다가 1971년 제주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돌하르방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운반수단이나 장비 인력 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하르방의 모습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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