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군주 영락제, 자금성을 건설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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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군주 영락제, 자금성을 건설한 이유

sk연예기자 0 671 0 0
영락제(永樂帝, 주체, 1360-1424)는 명(明)의 건국군주인 태조 홍무제(주원장)의 4남이자, 3대 황제로서 당시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이던 명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로 꼽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버지 홍무제를 능가하는 잔인무도한 ‘공포정치’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피의 폭군'이기도 했다. 그가 후대까지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인 자금성(紫禁城)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국 정치문화의 중심이자 절대권력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피의 군주 영락제와 자금성 잔혹사’ 편을 통하여 중국 정치의 중심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공간인 자금성의 탄생과, 그 설계자 영락제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조영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영락제는 어릴때부터 성품이 호방하고 무용이 뛰어나며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던 영락제는 아버지 홍무제가 사망하자 ‘정난의 변(1399-1402)’을 일으켜 조카이자 2대 황제이던 건문제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다.
 
재위 4년째인 1406년(영락 4년), 영락제는 원래 수도였던 남경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이미 원나라 시절에 지어졌던 궁성을 보수-확대하여 거대한 황궁을 짓도록 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영락제는, 화려하고 거대한 궁궐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황제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효과를 노렸던 것. 바로 600여년에 걸쳐 이어질 자금성 역사의 시작이다.
 
자금성은 건립까지 약 1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약 10만명의 장인(기술자)와 100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자재로 사용될 나무와 돌을 중국 각지에서 운송해오기 위하여 대운하가 건설되었고, 마차로 운송하는 게 불가능한 돌은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서 물을 길어서 길에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동원되어 엄청난 규모의 궁궐 건립을 위하여 댓가없는 노동착취와 가혹한 수탈을 감수해야했다.
 
1421년, 마침내 자금성이 완공된다. 자금성은 약 980여 개의 건물과 9천여 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뉜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업무장소인 태화전(太和殿)· 회의실인 중화전(中和殿)· 연회장이자 과거 시험장으로 활용되던 보화전(保和殿)으로 나뉘며 이를 ‘삼전’이라 불렀다.
 
외조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책봉식등 황실 공식행사를 담당했으며 오늘날 현대 중국 정부에서도 세계 정상이나 국빈들이 방문하여 외교행사를 벌이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조의 중심인 태화전에는 절대권력의 상징인 왕좌가 있다. 왕좌를 비롯한 자금성 곳곳에는 ‘용(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내정은 주로 환관-궁녀 등 궁의 직원들이 지내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내정에는 영락제의 침궁인 건청궁(乾清宮), 황제 부부의 신혼방인 곤녕궁(坤寧宮)과 휴식공간인 교태전(交泰殿)의 3궁이 속해 있었다. 건청궁 앞에는 태화전과 같이 사자상이 건립되어있는데, 특이하게도 태화전과의 차이는 귀가 덮인 모양새라는 것이다. 이는 황제가 “내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듣지도 보려고 하지도 말라”며 궁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자금성은 1400년대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현대까지 무려 600여년간 침수 피해가 단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자금성은 건설 당시부터 북쪽 지대를 높게 만들어 남쪽으로 물이 흐르게 하고, 용머리로 만들어진 배수구를 통하여 물이 하천으로 배출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었기 때문이다. 2021년 중국을 강타한 '베이징 폭우' 사태때도 유독 자금성만큼은 멀쩡하여 시대를 앞서간 배수시설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자금성이라고 웅장하고 화려한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금성 내부에 위치한 ‘냉궁’은 황제에게 버림받은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으로 활용됐다. 죄인으로 전락하여 냉궁에 갇힌 많은 후궁들은 생필품을 전달하는 아주 작은 창을 제외하면 모든 출입구를 봉쇄되고 환관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비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해야했다.

중국에서는 ‘냉궁에 갇히면 뒤를 돌아보지말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며 냉궁에서는 한맺힌 삶을 마감한 원혼들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유명하다. 중국 당국에서는 자금성을 민간에 공개한  이후에도, 냉궁만큼은 비공개 공간으로 분류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자금성 건립과 함께 영락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관(宦官)들을 정치의 중심에 기용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내시들과 비교하면 고환만 거세한 조선과 달리, 중국의 환관들은 음경까지 제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거세의 이유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존재가 되어 오직 ‘황제만을 위해서는 일하는 존재’로 만드는게 그 목적이 있었다.
 
영락제의 비정한 권력장악과 숙청 방식은 아버지 태조 홍무제(洪武帝)와 판에 박은 듯 흡사하다. 홍무제와 영락제는 둘다 명분없는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적들을 무자비한 무력으로 굴복시켜야했으며, 또한 집권 후에는 언제든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수 있는 신하들을 경계하느라 숙청을 거듭하면서 끝없이 무수한 피를 뿌려야했다는 공통점이다.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무도한 형벌들이 속출했고, 공신들을 숙청하거나 십족까지도 멸하는 ‘공포정치’가 일상이 됐다.
 
영락제는 왜 자신의 수족이 될 친위세력으로 환관을 선택했을까. 환관은 오직 그들을 뽑아준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집단이었고, 황제의 존재가 곧 그들의 유일무이한 권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3천년 가까운 중국 환관의 역사에서 정치개입은 이전의 왕조에도 있었지만,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영락제가 친위세력인 환관들을 조직적으로 육성하며 그 영향력이 한층 비대해진다. 오히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 사이에서는 신채적 장애를 감수하고라도 황제의 측근에서 일하며 권세를 누릴 기회를 얻을수 있는 환관의 인기가 높아지며 명 말기에는 3천명의 환관을 모집하는데 2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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