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눈에 이슬이..." 시도는 좌절됐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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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눈에 이슬이..." 시도는 좌절됐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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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 25일 중앙청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며 문일민이 할복하자 많은 시민들이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관련 기사: "조선독립이 안돼 죽는다"... 자결 시도한 독립운동가, 그 내막 https://omn.kr/23yi9 ).

한 시민은 "애국자를 살리겠다"며 문일민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와 헌혈했고, 동국대학교 사학부에 재학 중인 여학생 최계량은 병문안 후 아래와 같은 다짐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문 지사(志士)의 장행은 국내적으로 세 가지의 의도로써 관행되었다고 믿습니다. 첫째 현재의 부패한 사회현상을 통감하여 개혁하기 위함이요, 둘째 독립운동이란 이렇게 해야된다는 즉 철저하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된다는 가르침이며, 셋째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고 살 곳 없는 우리 겨레의 사실을 죽음으로써 군정당국에 호소하는 것이오! 민족 공동책임으로서의 죽음을 차지고 장행하시던 그 순간을 겨레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의 희기로서 살란 의무가 있다고 믿으며 결심하는 바입니다." -  <독립신문> 1947년 11월 6일자

당시 언론에서 문일민을 의사(義士)·지사(志士)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문일민의 행동이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불과 2개월 뒤 문일민의 할복 의거를 모방한 사건도 벌어졌다. 1947년 12월 24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임기수(林基秀)라는 26세 청년이, 조국의 독립이 여전히 먼 것을 개탄하고 청년들의 각성을 일으키고자 할복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해당 사건을 보도하면서 '제2의 문일민 사건'이라고 소개했다.

"김구 선생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한 기자의 회고

한편, 문일민의 할복은 해외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문일민의 할복 소식을 접한 직후 조소앙은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를 남겼다고 한다.

老髮衝冠六十翁 늙은 모발 관을 치는 예순 살 노인
忍命可忍剖心胸 목숨을 아낀다면 차마 심장을 가를 수 있으랴
追隨先烈君先逝 선열을 따라 그대가 먼저 가버렸으니
痛恨半生孰與同 통한스럽네, 남은 반생 누구와 함께 할까

조소앙은 문일민이 절명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로 사건 직후 문일민의 사망 오보가 보도됐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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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응급수술 끝에 문일민이 극적으로 소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조소앙·원세훈 등은 문일민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와 "문씨를 이렇게 한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들도 죽어 마땅하오"라고 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조덕송 기자가 훗날 40여년 뒤 기사를 통해 회고한 바에 의하면, 김구는 병상에 누워있는 문일민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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