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이 향기로운 족속'이 작정하고 뛰어든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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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향기로운 족속'이 작정하고 뛰어든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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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천명은 27세 때 발표한 '사슴'에서 청정하고 고고한 내면세계를 노래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읊었다.
 
그는 세속과 거리를 둔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의 정신세계를 관조했다. 그런 뒤 제2연에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라고 노래했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라고 했다. 시인이 관조하는 내면세계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인 1932년 21세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뒤 조선중앙일보사 및 조선일보사에 들어간 그는 1938년에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해에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던 그는 얼마 안 있어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드러냈다. 일본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을 응원하는 극우세력의 의식 세계가 그에게서 표출됐다.
 
군국주의 정치단체 핵심으로 활동

대통령 소속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 노천명 편은 "1941년부터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용산 호국신사 어(御)조영지 근로봉사 참여, 결전문화 대강연회에서의 시 낭독, 경성 방문 대동아문학자 대표 환송식 참여, 대동아전 일주년 기념 국민 시 낭독회에서의 시 낭독 등의 행위를 통해 총후(銃後) 문인의 문필보국에" 힘썼다고 서술한다.
 
1941년 이후의 노천명은 어(御)를 붙여 공손한 느낌을 가미한 호국신사 어조영지 봉사 활동에도 참여하고 전쟁 지원을 위한 갖가지 문학 활동에도 가세했다. 이 시기의 그는 후방 문인의 문필보국에 힘쓰는 전형적인 친일 문인이었다. 늦어도 서른 살부터는 이런 군국주의 침략 활동에 동조했다. 이 무렵의 그는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고고한 내면세계를 발견하는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간사로 활동한 조선문인협회는 겉으로는 한국인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였다.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은 조선문인협회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조선 문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가입 문제 등 기타를 상의한 데서 남상(濫觴)한다"고 지적했다. 전쟁 동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모인 데서 이 단체가 기원했다는 설명이다.
 
<친일문학론>은 "시오바라 도키사부로가 조선문인협회의 탄생에 있어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고 알려준다. 총독부 학무국장이 이 단체의 배후였던 것이다. 또 발기인 대회가 1939년 10월 20일에 열린 것도 야스쿠니신사 임시 대제일(大祭日)에 맞춘 것이라고 임종국은 해설한다.
 
이때 단체의 설립 취지로 규정된 것도 "비상시국하의 문필보국"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표방했으니, 처음부터 순수한 문인단체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10월 29일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결성대회는 "이광수의 천황폐하 만세삼창으로 폐막하였다"고 위 책은 말한다. 또 시오바라가 이 단체의 명예총재가 됐다고도 말한다. 문인단체로 보아줄 수 없는 군국주의 정치단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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