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가장한 친일로 상당한 재산 축적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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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가장한 친일로 상당한 재산 축적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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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간섭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벌어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 반혁명 운동 차원의 간섭 전쟁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한민족·러시아 대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1920년 3월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하는 니항 사건이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사할린섬 최북단의 바다 건너 맞은편인 러시아 니콜라옙스크에서 한국 독립군 약 380명이 가담한 연합부대가 일본 군인과 관헌이 포함된 700여 명을 살해했다. 강 하구인 니콜라옙스크에서 일어났다 하여 니항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일본의 즉각적 보복을 불러왔다. 일본은 다음 달인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월 참변'이라는 한국인 탄압을 자행했다.
 
이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들은 최재형과 더불어 김이직·엄주필·황경섭 4인이다. 이 중에서 김이직의 본명은 김정일이다. 김이직은 고향에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도주한 뒤 사용한 가명이다.
 
이들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된 뒤 사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형을 당했다. 일본 육군성 발표를 보도한 1920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총살 사건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이들이 체포 당시 무기를 들고 저항했을 뿐 아니라 이송 도중에 탈출했기 때문에 총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가족들은 물론 대다수 한인들이 일본 측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2007년 <역사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4월 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은 지적한다. 무기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저항했겠느냐는 분위기기 팽배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이때, 그 누구보다 분개한 인물이 김이직의 동생인 김마리아다. 그는 일본 헌병대에 가서 시신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화장이 끝났다고 하자, 그럼 화장터를 알려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래도 되지 않자 "김이직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평남 용강에 가서 김이직의 두 아들인 김린성·김남성 형제를 만나 일본 돈 5천 원을 장만하여 하르빈에 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수색당하여 압수당하였다"라고 위 논문은 독립투사 이인섭의 글을 인용해 설명한다.
 
운동자금을 하얼빈에서 압수당한 상태에서도 동생 마리아는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때 그가 처단하고자 한 대상은 김이직의 동업자인 함동철이다. 함동철이 오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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