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고대에 전두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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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고대에 전두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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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는 1965년에 대일 굴욕외교를 강행한 박정희가 독재자로 변해가던 시기의 야당 지도자다.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2년 뒤이자 제6대 대선(5.3)과 제7대 총선(6.8)이 임박한 1967년 2월 7일, 유진오는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대표위원이 됐다. 두 선거에서 연패한 뒤인 이듬해 5월 20일에 총재로 선출된 그는 1970년 1월 7일 건강 문제로 사임할 때까지 제1 야당을 이끌었다.
 
그는 1967년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연달아 패했지만, 강력한 지도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자신의 직함을 대표위원에서 총재로 격상시켰다. 1968년 5월 13일 자 <경향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기존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비주류 측의 집단지도체제 요구를 억누르고 총재 체제를 확립시켰다.
 
박정희가 3선 개헌(10.17)에 성공한 직후인 1969년 11월부터 신민당 내에서 김영삼(1927년생) 주도로 40대 기수론이 부각되고 김대중(1924년생)·이철승(1922년생)이 함께 부각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 태어난 유진오의 정치 인생은 이 현상의 출현과 함께 저물게 됐다.
 
유진오는 야당 지도자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이것만으로는 그의 인생을 설명하기 힘들다. 여타 영역들에서 남긴 족적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헌 헌법으로 불리는 1948년 헌법의 기초자다. 또 1935년 작 단편소설인 <김 교수와 T강사>의 작가다. 동시에,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1980년 2월 23일 자 <경향신문> 기사가 "여러 방면에서 그의 천재성을 발휘해 왔다"고 평한 것처럼, 그는 여러 분야에 뛰어들었고 그때마다 좋건 나쁘건 명성을 쌓았다.
 
여러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특성은 일제강점기 때도 현저했다.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거친 그는 1924년에 대학 예과 입학 모의시험과 경성제국대학 예과(고교급) 입학시험에서 각각 1등을 했고, 1929년 경성제대 졸업 때도 수석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학교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예과 때는 문우회란 모임을 만들고 <문우>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본과인 법문학부 재학 때는 좌파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했다. 반체제 서클에 가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이듬해에는 단편소설 <스리>를 내면서 스물한 살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 경성제대 졸업 뒤에는 학술지 <신흥>도 발간하고 극단 메가폰도 결성했다. 그러면서 대학 강사 생활을 하다가 31세 때인 1937년에 훗날의 고려대인 보성전문학교의 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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