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중상류층을 나무라는 일본군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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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중상류층을 나무라는 일본군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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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통폐합' 하면 흔히 전두환 때인 1980년이 떠오르지만, 일제 때인 1930년대 후반의 언론 통폐합도 규모가 상당했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이로 인해 한민족 언론의 명맥이 자칫 끊어질 수도 있었다. 숭실대학교가 기증받은 조선총독부 극비 문서를 다룬 1989년 10월 18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 중 '언론기관 통제 지도책'(1939년), '한글 신문 통제안'(1940년),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보 쇄신 강화책'(1939년) 등 언론 관계 자료들은 대동아전쟁을 앞두고 조선의 민족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극비 보고서. 이에 따르면, 조선 내 68개 신문·잡지·통신에 대한 통폐합 작업을 실시, 중앙지의 경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합병하고, 지방지는 1도 1사 원칙에 따라 3개년(1939~1941)에 걸쳐 통폐합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전쟁 분위기에 편승한 이 같은 대대적인 언론 탄압에서 실무를 담당한 한국인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정훈(鄭勳)이 바로 그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은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조선 주둔 일본군 예하 사단에서 복무하였고, 1937년 10월부터는 군사령부에서 언론·문학·예술 및 일반 여론을 상대로 한 감시와 통제 업무를 수행"한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비중 있는 업무를 수행한 것치고는 신상 정보가 별로 없다. 1909년에 육군무관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1900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출생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훈 편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09년 7월 학교가 폐지되면서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육군유년학교에 예과 2년생으로 편입했다"고 한 뒤 1913년에 본과를 졸업했다고 기술한다. 그런 다음, 그해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5년 5월 졸업한 뒤 12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언론 및 선전 분야에 투입된 것은 소좌(소령) 때인 1937년 10월이다. 언론통폐합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부 신문반에 투입됐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제시된 1937년 10월 20일 자 '조선군 신문반 업무담임 분담표'에 따르면, 임시 직원과 정직원을 포함한 신문반 구성원 9명 중에서 한국인의 성을 가진 사람은 2명이었다. 창씨개명령이 공포(1939.11.10)되기 2년 전인 이 시점에 한국인 성을 가진 사람은 정훈과 유씨(임시 직원)뿐이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아야 업무 수행이 수월한 이 부서에 한국인이 적었던 것은, 한국인의 의식을 통제하기 위한 부서에 한국인을 배치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부서에서 유일한 한국인 정직원이었다는 것은 정훈이 그만큼 신뢰를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문인들의 친일 활동 주선하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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