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녕당 아기씨' 덕혜옹주, 조현병에 걸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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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당 아기씨' 덕혜옹주, 조현병에 걸리기까지...

sk연예기자 0 119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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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딸이자 순종의 이복 동생으로, 흔히 한반도 왕조 시대의 '라스트 프린세스(마지막 왕녀)'로 알려진 인물이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망국의 아픔과 불행한 개인사까지, 누구보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만큼 그녀의 인생은 책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문화의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했다.
 
6월 2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는 왜 일본 정신병원에서 발견됐나'편을 통하여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의 덕수궁 복녕당에서 조선 26대왕이자 대한민국 초대황제 고종과 후궁인 귀인 양씨 사이에서 고명딸로 태어났다. 당시 61세의 고종은 환갑이 넘어 얻은 늦둥이 첫 딸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 덕혜옹주는 자라나면서 아버지 고종을 똑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당시 고종은 일본에 의하여 아내 명성황후를 잃었고, 아들 영친왕은 인질로 끌려갔으며, 결국 왕위마저 아들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고 나라까지 빼앗기는 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덕혜옹주의 탄생은, 고종에게는 삶의 낙을 찾게 해주는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이다.
 
고종은 엄청난 딸바보이자 극성아빠였다. 불과 생후 50일 만에 덕혜옹주를 자신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데려와 키우게 했는데, 조선 건국 이래 왕의 거처에서 살았던 인물은 덕혜옹주가 유일하다.

또한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어느날 함녕전에서 덕혜옹주를 재우던 중 고종이 갑자기 들어오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고 했으나, 고종은 '아이를 깨우면 안 되니 그냥 누워있어라'고 만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신분고하가 가장 철저한 궁궐에서 '일개 궁인이 감히 군주 앞에서 드러눕는 게 허용된 것은 변씨 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덕혜옹주가 5세가 되었을 때, 덕수궁 준명당에 덕혜옹주만을 위한 최초의 왕실 유치원까지 설립했고, 지체 높은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근대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고종 부녀의 거처인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의 거리는 고작 150미터에 불과했지만, 고종은 왕인 본인도 사용하지 않던 가마를 이용하여 어린 딸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덕혜옹주에 대한 아버지 고종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모든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명랑한 소녀로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해줄 것만 같았던 아버지 고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호적 등록이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모든 권력을 잃은 고종은 친딸을 왕실족보에 올리는 것조차 일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일본은 생모 양귀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핑계로 덕혜옹주의 입적을 거부해왔다. 고종은 왕실후손을 경계하던 일제에게 덕혜옹주가 자신의 딸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언제든 위협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에게 "내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것은 오직 이 아이 하나"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직접 덕혜옹주를 본 데라우치는 "귀엽고 천진한 옹주를 보고 있자니 까다로운 핑계를 대지 못하겠다"며 결국 고종의 부탁을 수락했고, 덕혜옹주는 간신히 왕실족보에 입적할 수 있었다. 당시만해도 이름도 없이 그저 '복녕당 아기씨'로만 불리우던 그녀는 6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덕혜옹주라는 정식 이름과 함께 왕실 후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의 왕공족들을 일본 천황 가문과 혼인시켜서 완전히 흡수하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덕혜옹주 역시 그렇게 될까 두려웠던 고종은,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우리 나라 사람과 혼인을 맺어주기 위하여 은밀하게 계획을 서둘렀다. 그렇게 덕혜옹주의 약혼자가 된 인물이 고종의 최측근인 비서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계획을 눈치챈 일제가 김황진의 입궁을 금지시키며 혼약은 무산되고 말았다. 고종은 사랑하는 딸마저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부모 잃은 뒤 바뀌는 덕혜옹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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