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직전, 유성룡이 꺼내 든 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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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 유성룡이 꺼내 든 비책

sk연예기자 0 349 0 0
'조선의 처칠'로 불리우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황희, 정도전, 맹사성, 최명길, 이원익 등과 함께 한국사에서 명재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 활약하며 벼랑 끝에 놓인 조선을 묵묵히 지탱했으며, 행정·경제·외교·민생에까지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다재다능의 표본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남긴 징비록(懲毖錄)은 지금까지도 후세들에게 역사의 처절한 교훈을 통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성찰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7월 26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66회에서는 '이순신을 추천한 류성룡은 왜 임진왜란 직후 탄핵당했나' 편을 통하여 유성룡의 일대기와 징비록의 탄생 비화를 조명했다.
 
좌의정(부총리)-병조판서(국방부장관)-도체찰사(임시지역사령관)-영의정(국무총리) 등,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위직을 홀로 모두 역임한 인물이 있다. 단 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일국의 국방에서 행정까지 모두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이 아닌 이상, 정상적인 국가 체제에서는 보기드문 장면이다. 당시는 전시(戰時),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조선사 최대의 난세였다. 이는 그만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해당 인물이 수많은 중책을 도맡아야할만큼 대단한 인재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유성룡이었다. 흔히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하면 충무공 이순신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내정에 있어서 유성룡이 남긴 수많은 업적들은 결코 이순신에 뒤지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성룡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유성룡은 1542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아들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고 안동에서 자라났다. 21세가 된 유성룡은 당대의 석학이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스승 이황은 유성룡과 불과 몇 마디를 나눠보자마자 바로 그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이황은 유성룡을 문하에 들인 이후에도 종종 "자네는 훗날 큰 일을 해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황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이 정도의 찬사와 기대를 받은 것은 유성룡이 유일했다.
 
1566년, 25세의 유성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유성룡은 조선의 대표적인 언론기관 3사에 해당하던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을 두루 거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41세때는 현재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사헌부 대사헌의 직위까지 올랐다. 명석한 유성룡은 업무에 능할뿐 아니라 박학다식하여 노련한 대신들도 모르는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유성룡을 찾았을 정도라고 한다.
 
국왕 선조도 유성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우복집'에 따르면 선조는 "유성룡은 어진 선비이면서도 재주가 있는 바, 조정 신하들 가운데 아주 걸출한 자"라고 평하며 극찬하고 있다. 특히 유성룡은 관료들이 세력을 나누어 대립하던 당시 조선의 붕당정치에서 다툼을 중재하고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역할을 전담하며 '조정의 해결사'로서 선조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 조선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집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조선에도 퍼져있었고, 심지어 조선이 이에 동참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다면 명나라에도 일본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에 사신 파견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유성룡은 선조에게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능한 장수를 뽑아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성룡은 일본의 위험성과 함께 허약해진 조선의 국방력이라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선조는 유성룡의 의견을 받아들여 1590년 3월, 일본을 파견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한다.

유능한 장수의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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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 유성룡은 빠르게 국방을 재정비하고 유능한 장수들을 발탁하는 데 앞장선다. 이 때 유성룡이 천거한 인물이 훗날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활약하는 이순신과 권율 등이다.

유성룡은 이순신과는 세 살 터울로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지냈던 친우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한 유성룡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이순신은 중앙조정에서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과거 북방에서 복무하다가 성을 비우고 쫓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전력도 있었다. 실제로 이순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성룡은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이순신의 능력과 진면목을 확신하고 있기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조 역시 유성룡의 청을 받아들여 이순신을 무려 7계급이나 특진시킨 정 3품 전라 좌수사로 과감하게 기용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훗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는 신의 한수가 된다. 유성룡의 최대 업적이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1591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들이 복귀하지만,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하여 황윤길과 김성일, 두 통신사의 의견이 정반대로 엇갈리며 오히려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김성일은 유성룡과의 대화에서 본인도 사실 일본의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민심이 동요할까봐 일부러 자신의 생각을 숨겼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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