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기일에 맞춰 완성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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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기일에 맞춰 완성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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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③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석사논문 부친 까닭>에서 이어집니다.)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완성 직후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뜨겁고 뭉클한 기억들이 남아있다. 이번 편에서는 해당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94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안경신의 얼굴

2021년 9월의 어느날,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 조사 중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문일민 선생과 함께 광복군총영 소속으로 평남도청 투탄의거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1888~?)의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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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광복군총영 평양 폭탄대 소속으로 문일민·우덕선·장덕진·박태열 등과 함께 평양에 침투한 안경신 선생은 사과장수로 위장하여 광주리에 사과 대신 폭탄을 넣고 운반하는 등 문일민 선생의 평남도청 투탄의거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광복군총영의 유일한 여성 대원으로 거사 당시 임산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거사 후 국내에 남아있다가 일제에 피체된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7년 12월 14일 가출옥했다. 안타깝게도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또한 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사진 한 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흐릿한 초상화 한 장이 유일하게 남아있긴 했지만 삽화 수준의 그림이라 선생의 온전한 얼굴을 상상하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평남도청 투탄의거 관련 기록들을 조사하던 중 안경신 선생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해당 사진은 가출옥 직후 이뤄진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에 실려있었다. 새로 발굴된 사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비로소 안경신 선생의 얼굴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안경신 선생의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는 사실에 크게 흥분했다. 출판사 다니던 시절 <임정로드 4000km>를 만들며 인연을 맺었던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에게 해당 사진에 대한 보도를 부탁했다. 그렇게 <오마이뉴스>의 단독 보도로 비로소 이 사진이 94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관련 기사: 94년 만에 발견된 '평남도청에 폭탄 투척' 안경신 선생 사진 https://omn.kr/1v8hc)

보도 직후 국가보훈부(당시 국가보훈처)에서도 발빠르게 반응했다. 공훈전자사료관의 안경신 선생 사진을 기존의 초상화 대신 새로 발굴된 사진으로 교체한 것이다.

한편 사진을 발굴하게 된 사연이 소개되자 본인을 안경신 선생의 먼 후손이라고 소개한 이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소 뒷걸음 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역사학도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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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전자사료관 사진 교체 직후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을 찾았다.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기에 선생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나는 미리 인쇄해온 선생의 사진을 위패 옆에 놓고 묵념을 올렸다.

출옥 직후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설지(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 같이 생각된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나는 뒤늦게나마 선생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 조금이나마 선생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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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기일에 맞춰 논문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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