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증거조작, 절도... 세 번의 반전과 사라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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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증거조작, 절도... 세 번의 반전과 사라진 진실

sk연예기자 0 26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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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린 '윤노파 살인사건'은 한국 경찰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로 회자된다. 증거를 은닉하고 자백을 강요하여 유죄를 이끌어내는 구시대적인 수사 관행, 도둑을 잡아야 할 경찰이 도둑이 되어버린 충격적인 반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억울한 피해자와 사라진 진실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씁쓸한 사건이었다.
 
7월 20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살인의 계절-윤노파 살인사건' 편이 그려졌다.
 
1981년 8월 4일 밤, 용산경찰서에 한 사건이 접수된다. 적산가옥이라고 불리우던 한 일본식 가옥에서 변사 사건이 의심된다는 연락이었다. 관할파출소의 전화를 받고 출동한 최용섭 반장과 형사들은, 현장에서 세 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집 주인인 71세 윤노파와 그의 6세 수양딸, 가정부인 19세 강양으로 세 사람 모두 여성이었다.
 
사건 현장인 가옥은 미로같은 특이한 구조에 곳곳에 불교 양식이나 탱화가 붙어있었으며, 빨간색 미등을 대거 켜 놓아서 어딘지 엄숙하면서도 무서운 공포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여기에 피해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출혈들이 가옥 곳곳에 낭자했고, 시신은 이미 부패가 한참 진행된 상태였다. 범행 수법은 모두 머리를 둔기로 때리고, 전깃줄로 목이 졸려서 잔혹하게 살해된 모습이었다. 최 형사처럼 수많은 사건을 접해본 경찰들조차도 "분위기에 압도돼서 무서웠다"면서 집안으로 선뜻 들어가는 걸 꺼려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피해자인 윤노파는 당대의 유명한 점술가이자 자산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윤보살'이라고도 불린 윤노파는 신통한 점술로 소문이 나며 복채만 해도 수백만원에서 천만원 이상에 이르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집앞에 고급승용차가 끊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윤노파는 점술만이 아니라 사업적인 수완도 뛰어나, 그 당시 돈으로 10억 원, 지금으로 치면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로 등극했다. 또한 불교계와 불우이웃돕기, 장학사업 등 기부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당대의 여걸이자, 인정 많은 할머니로 평판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토록 신통한 능력을 자랑하던 윤노파지만 정작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경찰은 용의자로 남성에, 윤노파와 아는 사이인 면식범, 원한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을 유력하게 봤다. 범인이 사용한 망치와 장갑, 빨랫줄 등의 범행도구들은 모두 이미 윤노파 집안에 있던 물건들로 밝혀졌다. 집 내부는 구조가 복잡하고 불을 켜지 않으면 대낮에도 컴컴했는데, 그럼에도 집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찾아서 범행에 사용했다는 것은 범인이 그 집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두 번에 걸친 확인사살이나, 굳이 살해된 피해자들에게 이불까지 덮어놓은 것은 심리적으로 가해자와 원래 알던 사이이고 그래서 정체가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경찰이 사건발생 2주 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범인으로 지목할 인물은, 놀랍게도 윤노파의 조카며느리인 고씨였다. 그녀는 "어머니 보고 아파트 사달라고 했더니 아파트 못 사주겠다고 하더라", "어머님만 죽이고 저도 죽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윤노파와 고씨가 만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2년 전이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윤노파가 친아들처럼 여기던 조카와 결혼한 사람이 고씨였다. 그녀는 의사 아버지를 두고 서울대를 졸업한 학벌과 미모를 겸비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고씨를 마음에 들어하며 조카에게 소개해준 것은 바로 윤노파였다. 고씨는 윤노파를 '어머니'라 부르며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제는 끔찍한 살인극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것이다.
 
고씨는 윤노파가 당초 약속했던 재산을 한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데 대한 배신감과 원망을 품고 살해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또한 고씨의 집에서는 윤노파의 패물들이 증거물로 나오기도 했다.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고씨의 범행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씨는 경찰 수사에 이어 검찰에 송치되어서도 순순히 모든 범행을 인정했다. 어머니처럼 모시던 어른을 비롯하여 무려 세 사람이나 잔혹하게 살해한 죄질을 감안하면 재판에서도 사형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전이 벌어진다. 1981년 9월 28일, 고씨의 1차 공판일에서 고씨가 돌연 "판사님, 저는 억울하다. 저는 그날 어머니댁에 가지도 않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서 그간 본인의 진술을 180도 뒤집은 것.
 
고씨의 변호를 맡았던 김형준 변호사는 경찰이 고문과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경찰은 고씨가 연행됐을 때, 경찰서가 아닌 시내 호텔로 데려갔고 여기서 며칠씩 잠도 재우지 않고 폭력과 고문을 일삼았다고 한다. 고씨는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자백하면 4~6개월이면 나올 수 있다'라고 경찰의 회유를 믿고 각본대로 범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주장했다. 고씨가 검찰에서 범행을 부인하려고 하자 형사들이 구치소까지 찾아와 '다시 데려다 전기고문할 수 있다'고 위협하여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당연히 법정은 난리가 났다. 고문을 통한 자백은 당연히 인정을 받지 못한다. 경찰은 곧바로 반박 성명을 내며 수사 과정에서 모든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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