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이 끝내 전복하지 못한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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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이 끝내 전복하지 못한 한 가지

sk연예기자 0 891 0 0


영화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이 "완벽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Team JVS)일 수도 있다. 블랙 코미디에 관한 정의가 애매한 데다 다의적이긴 하나 어느 정도 수용할 만한 평가이다.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Forbes)라는 평가엔 동의하지 못하겠다. 어떤 사람은 웃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렇게 많이 웃기지 않았다. 너무 직접적으로 현실을 파고들어 리얼리즘이나 다름없었다. 포브스 또한 액면 그대로 웃음에만 주목한 것은 아니지 싶다.
 
in der Wolken
 
관객은 보통 리얼리즘에서는 웃으려고 하지 않는다. 드물게 웃음과 리얼리즘이 공존하는 장르가 말하자면 블랙 코미디이다. '블랙 코미디'에서 '블랙' 요소가 매우 강력하다면 아무리 '코미디' 요소를 버무려 넣어도 웃음이 마뜩잖게 된다. 관객에 따라 '블랙'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아니면 '블랙'과 대조 때문에 '코미디'를 더 즐기기도 한다. 반대로 '블랙'의 자장(磁場)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관객은 '코미디' 영향권에 잘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슬픔의 삼각형>처럼 리얼리즘이 강한 블랙 코미디에서 희극성은 그러므로 리얼리즘을 뜬금없이 들어내고 또 맥락 없이 이탈할 때 발현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 최고 웃음 요소는 "in der Wolken"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슬픔의 삼각형>은 젠더, 부, 자본주의, 정치, 권력, 계급, 인종 등 사회 문제를 골고루 다룬다. 흐름상 난민 등 몇 가지 문제를 포함하기 어려웠지만, 하도 꼼꼼하게 문제를 챙겨서 영화로 만든 사회학 교과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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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모델 커플 칼(해리스 디킨슨)과 야야(샬비 딘)가 젠더 문제를 중심으로 극을 끌고간다. "돈(을 이야기하는 것)은 섹시하지 않다"는 야야의 주장이 아마 1부의 문제를 요약한 대사이지 싶다. 전면에 보이는 것이 그렇다는 얘기고 패션계 스케치를 통해 젠더 문제 뒤편에 있는 자본주의와 계급, 상업성 혹은 물신성을 이른바 블랙 코미디의 프리즘으로 보여준다.

2부 무대는 초호화 크루즈. 협찬으로 승선한 칼과 야야 커플 외에 크루즈에 탑승한 인물은 부자와, 부자를 모시는 승무원이란 두 계급으로 나뉜다. 크루즈 상황 묘사가 현실 그대로여서 어떤 이는 웃음을 터뜨릴 수 있겠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모습 또는 사회 현실이 투사돼 불편할 수 있겠다. 태풍 속의 만찬은 외형상의 슬랙스틱 너머에서 왜인지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주의를 직관하게 만든다.

2부는 전복의 전 단계이다. 이 단계를 특징짓는 사건은 구토이다. 토마스 선장(우디 해럴슨)과 '똥팔이' 러시아 자본가 디미트리(즐라트코 부리치) 사이의 취중 대담은 아수라장 속에 선내 방송으로 중계돼 태풍의 하이라이트 격으로 멀미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엉망진창 화면과 너무 잘 어울리는 부조리한 BG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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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에서 똥물이 솟구치고 그 똥물이 크루즈를 휩쓸어버리는 장면은 3부의 예고편이다. 영화 <기생충>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기생충>에서 이 장면이 반지하 생활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담담한 서술이라고 한다면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전복의 전조를 보여주는 하나의 비유가 된다.

3부에서는 세상이 180도 바뀐다. 초호화 크루즈 안에서 작동한 계급질서가 뒤집히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다. 다만 이 전복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며 결말에서 제시되듯 구 질서는 복구된다. 또는 복구될 예정이다. 배 침몰의 원인이 태풍이 아니라 해적인 것과 수류탄을 만들어 돈을 번 자본가가 자기가 만든 수류탄이 터져 숨지게 만든 것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세계관이 반영된 흥미로운 메시지이다. 현실이 난공불락이라 하여도 영화적 현실에서는 소박한 전복의 기대라도 품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지배와 종속, 폭력과 순응은 보통 위선과 포장으로 은폐되고 더러 다른 것으로 전치되기도 하지만, <슬픔의 삼각형>에선 누군가의 얼굴에 뚜렷한 '슬픔의 삼각형'처럼 노골적으로 날것이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 한 안 볼 수 없다. 보톡스가 유력한 해법이 된다. 보톡스가 슬픔을 지운다. 부자 승객의 요구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 돛에 존재하는 때마저 닦아야 하는데 미간 사이 슬픔을 지우는 게 대수인가. 종국의 웃음은,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영화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통찰할 수 있는 이에게 가능해진다.

영화 전체를 통해 아마 가장 웃기는 인물은 오직 "in der Wolken"이란 말만 할 줄 아는 독일인 여성(슐만 아만다)일 것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상대 말을 알아들을 뿐 자신은 말하지 못하는 이 여성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이 "in der Wolken"이다. "구름 속에서"란 뜻의 독일어이다. 이 영화에서 아무런 맥락 없이 내뱉은 거의 유일한 대사이다.

맥락 없이 존재하는 유일한 대사라는 데서 새로운 맥락이 생기긴 한다. 처음에는 히치콕 식의 맥거핀 비스름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영화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in der Wolken"을 외치게 한 데서 유머와 위트를 겸비한 감독의 독특한 스토리텔링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에 짝퉁 명품 판매상에게 간절하게 던지는 "in der Wolken"이란 대사는 많은 의미를 담았고, 그 전에도 "in der Wolken"으로 다양한 의미를 던졌다. 관객마다 다른 해석이 이뤄진 게 묘미라면 묘미겠다. 부담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장치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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