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간직한 여자가 세계 최북단 열차에 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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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간직한 여자가 세계 최북단 열차에 오른 이유

sk연예기자 0 895 0 0
북유럽 동토에서 막 도착한 차세대 거장의 견본
 
혹한의 겨울이 퇴장하고 경칩 절기를 갓 넘긴 때다. 1년 전부터 어느새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분리되어버린 것만 같은 북방의 동토 러시아, 그것도 하필 겨울을 배경으로 삼은 한편의 영화가 지금 막 도착했다. 단 2편의 장편만으로 칸영화제에서 각각 데뷔작품은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차기작은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핀란드의 떠오르는 거장, '유호 쿠호스마넨'의 두 번째 작업 < 6번 칸 >이다.
 
2016년에 선보인 감독의 장편데뷔작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실화를 각색해 어쩌면 핀란드 역사상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수 있었던 복서 '올리 마키'가 사랑과 성공 사이에서 순정을 택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흑백의 정갈한 화면을 배경으로 여타 상업영화의 전형성을 따르자면 실패에 가까운 결말인데도 훈훈한 감정을 전달했던 인상적인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감독은 차기작에서는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철도여행 중 우연히 같은 객실에 머물며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을 서로 공유하기에 이른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번 작업은 소설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인 '로사 릭솜'의 원작을 읽었던 감독은 옴니버스 연작 성격의 이야기 중 한 에피소드를 택일하고 가다듬어 스토리의 일체감을 유지하면서도 통합된 배경으로 정돈해낸다. 그로 인해 아주 간단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신기하게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이 절대 결말을 쉽게 재단하거나 인물들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기 힘든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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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라우라'는 핀란드에서 러시아 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다. 그녀는 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는 물론 세계 전체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인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북쪽으로의 여행은 원래 그녀가 하숙하는 중인 아파트 주인 '이리나'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단신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깊은 사연을 간직했음직하다.
 
코로나19 역병의 창궐로 중단된 후, 재개가 되어야 할 시점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통에 여전히 단절된 상태인 배낭여행자들의 로망,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풍경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그 덕분에 배낭여행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실제로 가보진 못했어도 이것저것 찾아보느라 익숙해진 러시아의 철도 객차 내부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다. 워낙 초장거리 노선인 터라 기차의 객실은 모두 침대칸이다. 라우라는 공간이 통째로 개방된 3등석 칸 대신에 중간급인 2등석 칸을 선택했다. 2층 침대가 2개 있는 4인실 '쿠페'다.
 
객실에는 또래의 러시아 청년 1명만이 동행으로 타 있었다. 그는 대낮부터 보드카를 들이키며 적당히 취한 상태에서 라우라에게 시시껄렁한 농을 던지다 결국 음담패설에까지 이른다. 일진이 사납다. 적당히 넘어가줄까 했지만 마침내 불쾌한 기분을 참지 못한 라우라는 객실을 바꾸려 시도해보지만 한국의 대중교통 종사자들 서비스와는 차원이 다른 러시아 철도 승무원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안 되서 그냥 중간에 내려 모스크바로 돌아가 버릴까도 싶지만, 라우라는 근래 하숙집 주인장 이리나와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하다. 결국 그녀는 도리 없이 다시 6번 칸으로 향한다.
 
짓궂은 장난과 희롱은 여전하지만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 청년 '료하'는 첫 만남에서처럼 아주 막 되어먹거나 상종하기 힘든 수준으로 불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여전히 서먹서먹하긴 하지만 둘은 서로를 관찰하며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란 증명처럼 말이다. 지식청년 외국인인 라우라와 광산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 료하는 대화 코드 맞추는 것부터 난항을 겪지만 서로 행선지도 같고 상대방에 대해 차츰 정보가 쌓이면서 그럭저럭 동행이 된다. 라우라는 무르만스크에 1만 년 전 고대인들이 새겨놓은 암각화를 보러간다는 걸 료하에게 알려준다. 료하는 열차가 정비를 위해 하루 정차하는 동안 '술과 할머니와 난로와 고양이가 있다!'며 라우라를 데리고 자신의 노모가 있는 고향집으로 향한다. 그 이후로 둘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둘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밀고 당기는 '티키타카'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어느새 료하는 라우라에게 평범하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둘이 친밀해질 찰나에 곤경에 처한 핀란드 남성 여행객을 라우라가 데려온다. 불청객이 생긴 셈인 료하는 질투 가득 섞인 반응을 보이며 그야말로 끙끙 앓는다. 하지만 그 핀란드 여행객은 만리타향에서 동포를 만난 김에 친절을 베푼 라우라에게 거하게 뒤통수치며 사라져 버린다. 그 결과로 상심한 라우라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료하와의 관계는 (모든 건 계획대로) 진전되는 기미를 보인다. 하지만 어느새 여행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잘 짜인 설정과 군더더기 없는 인물의 합이 돋보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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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 쿠오스마넨의 영화는 (다른 북유럽 예술영화들과 유사하게) 마치 간이 심심하기로 유명한 핀란드 요리 마냥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하고 사실적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지금 당장 화면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서 튀어나올 것처럼 설정 상의 캐릭터를 온전하게 형상화한다. 흔히 스타라 불리는 외모가 빼어난 연기자들이 적당히 흉내를 내 연기하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렇다고 스르륵 현실 재연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 전개에 딱 알맞게 녹아드는 정도로 일정한 톤을 유지한다. 그 밸런스 패치가 무척 절묘하다.
 
두 주인공, 라우라와 료하 역을 맡은 주연배우들은 이 작품으로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와 시상식들에서 남부럽지 않은 수상실적을 쌓았다. 하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이들의 연기는 실력을 과시하기보단 정말 재연배우 수준으로 작품에 스며드는 스타일을 취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 영화를 보던 이들은 그들의 캐릭터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라우라 역할의 '세이다 하를라'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이제야 불쑥 튀어나왔는지 궁금해질 만큼 영화 내내 한순간도 스크린을 떠나지 않고 종횡무진 화면을 장악하는 중이다. 정말 모스크바에서 (아마도 문학계열인 것으로 보이는) 학문의 길을 걸으며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연애에 괴로워하던 라우라 그 자체다. 연기자가 캐릭터에 거의 빙의하는 수준이다.
 
한편, 첫인상은 최악에 가깝지만 점점 이미지 개선에 성공해나가는 마성의 남자, 료하 역을 맡은 '유리 보리소프'의 얼굴은 제법 낯이 익다. 근현대 러시아의 세계적 아이콘 중 하나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청년기와 그의 저 유명한 발명품, AK-47 돌격소총 탄생과정을 담은 전기영화 < AK47 >의 주연을 맡았었다. 그리고 아직 국내 개봉은 않았지만 근래 국내외 영화제들에서 가장 주목받던 작품 중 하나인 <볼코고노프 대위 탈출하다>에서도 주인공 롤을 맡아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배우다. 그야말로 현재 러시아 영화계의 얼굴 중 하나라 해도 과장이 아닌 연기자다. 이 영화에선 러시아인이지만 정작 러시아어로 고급 어휘를 구사하는 데에는 외국인인 라우라보다 서툰 료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낸다. 지적이지만 정서적으로 방황중인 라우라와 상극을 이루다 점차 이해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긍정적 '러시아 남자'의 정석이라 할 료하 캐릭터에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캐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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