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성의 난데없는 귀국,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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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의 난데없는 귀국,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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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36년이 긴 세월인 줄 알았다. 살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군부독재의 숨통을 조여갔던 1987년 6월 대항쟁이 올해로 꼭 36년 전의 일이다. "광우야, 마음은 처녀인디 흰머리만 이렇게 나부렀시야"라며 세월의 덧없음을 하소연하던 어머니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때 분명 당신의 파릇파릇한 처녀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아우가 치안본부에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노동자 여러분! 놈들이 또 생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김용권 군이 보안대 놈들에게 끌려가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내무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노동자 신호수를 끌고 가 피범벅으로 때려죽인 놈들! 이놈들이 이번에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 4명을 야산에 끌고 가 집단 강간을 하였습니다. 노동 형제여 떨쳐 일어납시다! 솟구치는 분노로 전국을 휩쓰는 파도로 만듭시다! 살인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저항운동을 벌여나갑시다!

- 1987.3.8.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노동자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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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항쟁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일이었다. 역사연구자들은 한 장의 성명서를 보고 투쟁을 주도하는 세력의 정치 성향과 투쟁 전술을 분석했으나,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를 천직으로 삼았던 나는 좀 다르다.

1천 장 내외의 유인물이라면 등사기로 찍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들, 나병식과 김병곤 등은 등사기로 성명서를 찍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서 윤상원은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6월 항쟁에서 유인물을 1만 장씩 찍었다. 1만 장은 등사기로 찍을 수 없다. 인쇄기로 찍는다. 이때 '고양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는 운명적 난제가 제기된다. 누가 인쇄소를 섭외할 것이며, 누가 인쇄비를 조달할 것이냐? 어림잡아 아파트 한 채에 달하는 비용이 내 호주머니에서 나갔다.

유인물이 1천 장 내외라면 날쌘돌이 두세 명이 하룻밤이면 배포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인물이 1만 장 내외라면 상황이 다르다. 조직력이 전제되지 않고선, 대량의 유인물을 찍을 수도 없거니와 배포할 수도 없다.  
지난 12월 3일 시내 각 학교에는 '조선학생청년대중아 궐기하라'는 격문 수천 매가 배부되었다. 그 배부의 방법이 극히 교묘하여 책상마다 서랍 속에 격문을 넣어 두었다. 격문 작성과 인쇄, 배부의 주범은 장석천 등 1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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